-유홍준, <오므린 것들>
배추밭에는 배추가 배춧잎을 오므리고 있다
산비알에는 나뭇잎이 나뭇잎을 오므리고 있다
웅덩이에는 오리가 오리를 오므리고 있다
오므린 것들은 안타깝고 애처로워
나는 나를 오므린다
나는 나를 오므린다
오므릴 수 있다는 것이 좋다
내가 내 가슴을 오므릴 수 있다는 것이 좋다
내가 내 입을 오므릴 수 있다는 것이 좋다
담벼락 밑에는 노인들이 오므라져 있다
담벼락 밑에는 신발들이 오므라져 있다
오므린 것들은 죄를 짓지 않는다
숟가락은 제 몸을 오므려 밥을 뜨고
밥그릇은 제 몸을 오므려 밥을 받는다
오래 전 손가락이 오므라져 나는 죄 짓지 않은 적이 있다
배추는 오므릴수록 속이 하얘진다. 속이 딴딴해진다. 중심에 꼿꼿하게 일어설 꽃대를 숨겨놓는다.
겹겹의 속잎을 오므렸다가 펼친 나뭇잎에 햇살이 논다.
햇살이 미끄러지지 않도록 겹겹 잎 주름을 만든다.
어미 오리가 품에 새끼 오리를 오므리며 고개 젓기와 기름칠하기와 물갈퀴 젓는 법을 가르친다.
닭을 잡아먹은 적 없으니 오리발을 내미는 일은 없다고, 품에 든 새끼 오리에게 가르친다.
나는 나를 오므려 꽃대를 품는다. 아직 오지 않은 새끼를 품는다.
오리처럼 꽥꽥거리던 입술마저 오므린다.
노인은 아기를 품기에 알맞은 높이로 오므라진다.
밥그릇이 숟가락을 품듯 오므라진다.
외따로 손가락을 오므리면 주먹이 되지만, 손을 맞잡고 오므리면 기도가 된다.
손 우물이 된다. 마른 꽃밭과 개 밥그릇에 물을 떠주고, 남은 물로는 얼굴을 씻는다.
물을 뜨고 세수를 할 때면 등도 착하게 오므라든다.
*이정록의 <시가 안 써지면 나는 시내버스를 탄다>에서 따온 글.
줄인 내용이 많습니다. 원문으로 확인해 주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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