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신의 그대와 여는 아침

음악FM 매일 07:00-09:00
0226수 우리가 기억하는 한 추억은 살아있어요
그대아침
2025.02.26
조회 210
어느 해 여름 춘천에 일이 있어 갔다가 오랜만에 소양호를 볼까 해서 들렀더니,
호수 수위가 낮아지다 못해 바닥이 드러나 갈라져 있었다.
찰랑찰랑 물결이 빛나는 소양호만 상상하다 낯선 광경에 묘한 충격을 받았는데, 
그제야 여름 가뭄이 극심했음을 깨달았다.
물밑에 가라앉았던 옛 마을 터가 군데군데 보이고,
굵고 검은 나무가 둥치까지 드러난 모습.
지나던 관광객들이 수군거리며 멀리서 사진을 찍었다. 당산나무라고 했다.
원래 있을 곳이 아닌 호수 아래서 긴 시간 무엇을 기다렸을지는 알 길 없지만, 
언젠가 가뭄이 와 머리를 내밀 거라고,
이파리 하나 없는 검은 뼈와 힘줄 같은 둥치를다시 내보일 날이 있을 거라고
나무는 알았을까.

지금 사는 파주 인근에는 거의 폐허가 된 낡은 유원지가 있다.
아이가 꼬마였을 때 그곳 놀이기구와 호수 오리배를 타며 같이 놀았는데,
점차 한적해지고 낡아가더니 폐업한 지 오래되었다. 차를 타고 지나다 
적막하게 녹슬어가는 유원지를 보면 언젠가의 그 호수들 같다.
화창한 날 풍선을 손에 들고 입가에 아이스크림을 묻힌 아이들이
엄마 아빠의 손을 잡고 뛰어다니는 풍경은 다 사라졌지만, 
없었던 일은 아니었다. 환청 같은 웃음소리, 이름을 부르는 소리. 
그것들이 사라진 자리는 아늑하지만,
나는 그 아늑함만 남은 자리에서 이야기가 솟아난다고 생각하나 보다.

가뭄이 끝나면 호수의 수위는 제자리로 돌아오고
검은 당산나무의 흔적은 자취 없이 사라지지만,
수면 아래 그 나무가 있다는 것을 여전히 안다. 
마을 길과 허물어진 담벼락도, 부서진 지붕들이 있다는 것도.
그 가라앉은 마을들은 누군가의 무의식, 숨겨놓은 기억의 페허처럼 느껴진다. 
그게 애잔한 까닭은 그 속에 많은 이들이 남기고 간 추억이 있기 때문.
폐허는 아무것도 없는 곳이 아니다. 한때 뚜렷이 있었다가 무너진 곳이고 
많은 것들이 빠져나가 비어버린 곳, 큰 물길이 덮어 숨어버린 곳이다. 
추억이 없는 따뜻한 곳의 대척점에 실은 쓸쓸하고 아름다운 폐허가 있다.

*이도우의 <밤은 이야기하기 좋은 시간이니까요>에서 따온 글.
줄인 내용이 많습니다. 원문으로 확인해 주시고
개인SNS등에 그대로 옮겨가지 말아주세요~